[게이소설 88] 내 몸에 이상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4월의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뜯어보았다.
그가 네게 건네준 수많은 편지…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그 많은 편지 중 처음으로 내게 주었던 편지를 이곳에 옮겨 본다.
지면 관계상 모두 다 적을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길…
*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이 편지를 읽고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렵기만 하다.
나는 너를 고1 때부터 보아왔다.
너와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네가 우리 반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
나는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기분이 참 좋다.
예전엔 아침에 일어날 때도, 학교 운동장을 세 바퀴나 돌 때도, 아침 식사를 할 때도 정말 싫었는데 이젠 하나도 싫지가 않다.
몇 분 후면 학교에서 널 볼 수 있다는 기쁨에 매일 아침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너는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
남자의 얼굴에 어쩜 그렇게 예쁜 보조개가 필 수 있니.
속눈썹은 왜 또 그렇게 길고…
너의 눈을 보면 마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 같다.
너는 나를 볼 때 항상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너의 환한 미소를 볼 때면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네가 항상 웃는 모습이어서 그것 또한 좋았다.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하나 보다.
이상하다.
남자끼리 사랑을 한다는 것이.
그렇지만 나는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네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성별을 알 수 없는 천사로 보인다.
이것이 지금 내가 너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다.
지금은 밤 11시 30분.
창밖엔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다.
그 가로등 아래에 너와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품에 너를 안고 싶다.
너의 작은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
너와 함께 밤길을 걷고 싶다.
밤이 새도록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일 이 편지를 너에게 건네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네가 이 편지를 보고 나를 다시 안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은 왜일까?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나 보다.
오늘 오후에 네가 학원에 갈 때 너를 붙잡고 싶었다.
오늘 하루는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제가 내 생일이어서, 생일을 너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
내일 아침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용기를 내어 너에게 말을 걸어 보련다.
쉽지 않겠지만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
이상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나 자신이 점점 이상해져가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싫지가 않았다.
왜일까?
나를 사랑한다는 그의 말이 싫지가 않으니…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내 얼굴이 좀 여자 아이처럼 하얗고 반반해서…
반 아이들이 농담으로 “00아 사랑해. 너는 내거야.”
또 어떤 녀석은 “야! 게이!” 라고 했던 말들이 어느덧 익숙해져서일까?
하지만 그는 농담이 아니라 진실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데…
그게 싫지가 않았다.
그는 약간 까무잡잡하고 매끈한 피부.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중학교 시절 수영선수를 해서 그런지 잘 빠진 몸매와 넓은 가슴.
신체검사 때 우리 반에서 가슴둘레가 가장 넓었던 아이였다.
그러나 늘 말이 없는 아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조용하고 차분해서…
선생님들조차도 너는 참 여자 애 같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정말 예뻣을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지금이라면 일종의 성희롱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런 말들을 나는 참 많이도 듣고 자랐다.
그러나 그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내 몸에 이상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땐 너무 어렸었다.
아무것도 몰랐었고 내가 실은 남자에게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남자 품에 안기길 원했던 것을…
남자에게 사랑받기를 원했던 것을…
그땐 몰랐었다.
이 편지를 지금껏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읽고 또 읽고…
수업시작 종이 울릴 때까지 벤치에 앉아 나는 그의 편지를 읽었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게이

 

 

 

One comment

  1. […] 이 글의 두 번째 이야기. 내가 그를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그는 말수가 별로 없었지만, 매력 있는 아이였다. 잘생긴 얼굴과 꾹 다문 입술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상 같았다. 무뚝뚝하고 표현력은 별로 없었지만, 그런 면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는 그의 말에 나도 그를 마음에 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고 사랑해준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니까. 화실에서도 내내 그의 생각을 했다. 그도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날 저녁 나는 밤을 새워야 했다. 남자에게 보내는, 처음으로 보내는 러브레터… 친구들 생일이나 여자 친구에게는 간혹 편지를 써 보았지만… 남자에게 써보는 사랑편지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첫말을 뭐라고 어떻게 써야 하나… 무슨 말을 할까… 중학교 때부터 일기를 줄곧 써 왔기에 보통 편지를 쓸 때는 서너 장은 기본이었고 많이 쓸 때는 열 장을 넘길 정도로 잘 쓰는 편이었다. 친구들의 연애편지도 거의 다 내가 써주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날은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오직 그에게 답장을 쓰느라…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그는 나를 석이라 불렀다. 내 이름 현석에서 현을 빼고 그렇게 불렀다.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나를 그렇게 대해 주었다. 그런 점 때문에 내가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너에게 편지를 받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장난 같지는 않은데… 네게 뭐라고 답해야 할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편지를 읽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기분이 좋았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나도 너를 좋아하나 보다. 아직 많은 얘기는 못해봤지만, 네게 멋지게 답장하고 싶은데 어울릴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게 사랑이라고는 아직 말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사랑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사랑하고 싶다.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온종일 허둥지둥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내일 너를 보게 되면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려 한다. 오늘은 잠 못 들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라. 네가 바라는 대학에 꼭 가야지. 잘 자라. 너의 친구 석이가… 많고 많은 말 중에 그렇게도 할 말이 없었을까? 몇 시간을 썼다 지웠다 하며 쓴 편지가 겨우 두 장을 조금 넘겼다. 지금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글을 답장으로 써준 것 같다. 다음날 나는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학교에 갔다. 아침잠이 많은지라 거의 등교 시간에 딱 맞춰 등교하던 나였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지각을 했었다. 그런 내가 30분이나 일찍 학교에 간 것이다. 교실엔 몇몇 모범생들이 나보다 더 빨리 와서 열심히 영어 참고서와 해법 수학을 펼쳐놓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학교에는 항상 그런 애들이 있다. 흔히 말하는 공부벌레다. 소풍을 갈 때도 영어 사전을 들고 가는 애들 말이다. 그런 애들을 볼 때면 신기하기도, 불쌍하기도, 측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얘가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면서 운동도 잘했고 말수가 적으면서도 할 말은 하고 놀 때는 노는 정말 어느 한 곳 나무랄 데 없는 그런 애였다. 그날 그렇게 학교에 일찍 간 나는 다른 얘들이 볼세라 눈치를 보며 그의 책상 서랍에 편지를 넣었다. 그렇게 편지를 넣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 교실 문이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내 심장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린 적은 없었을 것이다. 후에 그와의 첫 키스를 나눌 때 빼고는… 어쩌면 타이밍이 그렇게도 잘 맞을 수 있을까? 거짓말 같지만 정말 그때 그가 들어왔다. 그와 나는 그렇게 사랑하도록 이미 하느님께서 정해주셨나 보다.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나를 쳐다보았고 나 또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몇 초의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그는 내가 그의 책상 옆에 있는 것을 보고는 어떤 예감을 했는지 곧 환한 웃음을 띄웠고, 내가 무안해할까 싶어서인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나는 한참을 서 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책가방에서 책과 필기도구를 꺼내놓고 오직 그를 생각하며 앉아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나가고 싶었다. 그는 복도 끝 계단난간에 서 있었다. 우리 교실은 4층이었고 건물 양 끝에 계단이 있었다. 계단의 공간이 꽤 넓은 편이었다. 건물 오른쪽 계단에서 첫 번째 교실이 우리 교실이었던 탓에 쉬는 시간이나 짬 시간이 날 때면 그 계단에서 얘들이 왔다 갔다 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며 서 있곤 했었다. 가끔 잘 생기고 멋진 얘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솔직히…그때부터 나에겐 그런 기질이 있었나 보다. 고2 때는 그와 내가 서로 다른 층에 있었기에 그를 자주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는 교실 밖으로 잘 나오는 편이 아니었다. 가끔 내가 미술실에 가기 위해 5층으로 갈 때 그가 어쩌다가 내 눈에 들어왔지만, 그때는 그에게 이상한 감정이 들지 않았었다. 그냥 참 잘생겼고 착하게 생겼다는 느낌 외엔… 그런 그가 계단에 서 있었다. 내가 자주 서 있던 그 자리에… 4월이라 그런지 아침 공기는 참으로 상쾌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나 맑게 내 몸으로 스며들어 왔다. 그는 계속해서 담장 너머로 학생들이 등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번의 망설임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이번에도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일찍 왔네..” “음.. 이렇게 일찍 오니까 좋다. 너하고 이렇게 이야기도 나누고…이렇게 여유로운 아침은 처음인 것 같다. 하하.” “후후…” 그도 엷게 웃었다. “나한테 편지 썼냐?” “응” “그거 주려고 일찍 왔구나?” “………” “아무튼, 고맙다. 답장도 써주고..” “뭘.. 너처럼 잘 쓰지도 못했다.” “잘 쓰고 못 쓰고가 어딨냐? 마음만 담겨있으면 되지. 오늘 네 얼굴을 어떻게 보나 걱정했는데… 이제 들어가자.” 함께 계단난간에 있다가 들어와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그가 내 손을 꼬옥 쥐었다. 아주 꼬-옥…그의 손이 정말로 따뜻했다. 그의 마음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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