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소설 95] 그가 내 손을 꼭 쥐었다.

이 글의 두 번째 이야기.
내가 그를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그는 말수가 별로 없었지만, 매력적인 아이였다.
잘생긴 얼굴과 꾹 다문 입술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상 같았다.
무뚝뚝하고 표현력은 별로 없었지만,
그런 면이 오히려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는 그의 말에 나도 그를 마음에 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고 사랑해준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니까.
화실에서도 내내 그의 생각을 했다.
그도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날 저녁 나는 밤을 새워야 했다.
남자에게 보내는, 처음으로 보내는 러브레터…
친구들 생일이나 여자 친구에게는 간혹 편지를 써 보았지만…
남자에게 써보는 사랑편지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첫말을 뭐라고 어떻게 써야 하나…
무슨 말을 할까…
중학교 때부터 일기를 줄곧 써 왔기에 보통 편지를 쓸 때는 서너 장은 기본이었고 많이 쓸 때는 열 장을 넘길 정도로 잘 쓰는 편이었다.
친구들의 연애편지도 거의 다 내가 써주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날은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오직 그에게 답장을 쓰느라…
그는 나를 석이라 불렀다.
내 이름 현석에서 현을 빼고 그렇게 불렀다.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나를 그렇게 불러주었다.
그런 점 때문에 내가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너에게 편지를 받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장난 같지는 않은데…
네게 뭐라고 답해야 할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편지를 읽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기분이 좋았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나도 너를 좋아하나 보다.
아직 많은 얘기는 못해봤지만, 네게 멋지게 답장하고 싶은데 어울릴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게 사랑이라고는 아직 말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사랑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사랑하고 싶다.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온종일 허둥지둥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내일 너를 보게 되면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려 한다.
오늘은 잠 못 들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라.
네가 바라는 대학에 꼭 가야지.
잘 자라.
너의 친구 석이가…
많고 많은 말 중에 그렇게도 할 말이 없었을까?
몇 시간을 썼다 지웠다 하며 쓴 편지가 겨우 두 장을 조금 넘겼다.
지금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글을 답장으로 써준 것 같다.
다음날 나는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학교에 갔다.
아침잠이 많은지라 거의 등교 시간에 딱 맞춰 등교하던 나였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지각을 했었다.
그런 내가 30분이나 일찍 학교에 간 것이다.
교실엔 몇몇 모범생들이 나보다 더 빨리 와서 열심히 영어 참고서와 해법 수학을 펼쳐놓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학교에는 항상 그런 애들이 있다.
흔히 말하는 공부벌레다.
소풍 갈 때도 항상 영어 사전을 들고 가는 애들 말이다.
그런 애들을 볼 때면 신기하기도, 불쌍하기도, 측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얘가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면서 운동도 잘했고 말수가 적으면서도 할 말은 하고 놀 때는 노는 정말 어느 한 곳 나무랄 데 없는 애였다.
그날 그렇게 학교에 일찍 간 나는 다른 얘들이 볼세라 눈치를 보며 그의 책상 서랍에 편지를 넣었다.
그렇게 편지를 넣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
교실 문이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내 심장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린 적은 없었을 것이다.
후에 그와의 첫 키스를 나눌 때 빼고는…
어쩌면 타이밍이 그렇게도 잘 맞을 수 있을까?
거짓말 같지만 정말 그때 그가 들어왔다.
그와 나는 그렇게 사랑하도록 이미 하느님께서 정해주셨나 보다.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나를 쳐다보았고 나 또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몇 초의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그는 내가 그의 책상 옆에 있는 것을 보고는 어떤 예감을 했는지 곧 환한 웃음을 띄웠고,
내가 무안해할까 싶어서인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나는 한참을 서 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책가방에서 책과 필기도구를 꺼내놓고 오직 그를 생각하며 앉아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나가고 싶었다.
그는 복도 끝 계단난간에 서 있었다.
우리 교실은 4층이었고 건물 양 끝에 계단이 있었다.
계단의 공간이 꽤 넓은 편이었다.
건물 오른쪽 계단에서 첫 번째 교실이 우리 교실이었던 탓에 쉬는 시간이나 짬 시간이 날 때면 그 계단에서 얘들이 왔다 갔다 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며 서 있곤 했었다.
가끔 잘 생기고 멋진 얘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솔직히…그때부터 나에겐 그런 기질이 있었나 보다.
고2 때는 그와 내가 서로 다른 층에 있었기에 그를 자주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는 교실 밖으로 잘 나오는 편이 아니었다.
가끔 내가 미술실에 가기 위해 5층으로 갈 때 그가 어쩌다가 내 눈에 들어왔지만,
그때는 그에게 이상한 감정이 들지 않았었다.
그냥 참 잘생겼고 착하게 생겼다는 느낌 외엔…
그런 그가 계단에 서 있었다.
내가 자주 서 있었던 그 자리에…
4월이라 그런지 아침 공기는 참으로 상쾌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나 맑게 내 몸으로 스며들어 왔다.
그는 계속해서 담장 너머로 학생들이 등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번의 망설임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이번에도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일찍 왔네..”
“음.. 이렇게 일찍 오니까 좋다. 너하고 이렇게 이야기도 나누고…이렇게 여유로운 아침은 처음인 것 같다. 하하.”
“후후…”
그도 엷게 웃었다.
“나한테 편지 썼냐?”
“응”
“그거 주려고 일찍 왔구나?”
“………”
“아무튼, 고맙다. 답장도 써주고..”
“뭘.. 너처럼 잘 쓰지도 못했다.”
“잘 쓰고 못 쓰고가 어딨냐? 마음만 담겨있으면 되지. 오늘 네 얼굴을 어떻게 보나 걱정했는데… 이제 들어가자.”
함께 계단난간에 서 있다가 들어와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그가 내 손을 꼬옥 쥐었다.
아주 꼬-옥…그런 그의 손이 정말로 따뜻했다.
그의 마음처럼…

 

게이

One comment

  1. […] 이 글의 세 번째 이야기. 그날 수업 중에도 그와 나는 수없이 눈을 마주쳤다. 서로에게 다정한 미소를 흘려보내며, 흘깃흘깃 선생님의 눈을 피해가며,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그가 점점 좋아지는 걸 몸으로 느꼈다. 도대체 이게 어떤 감정일까? 내가 잠시 미친 걸까?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가 좋았고, 당시에는 내가 게이라는 생각도 전혀 못 했으니까… 점심시간에 우리는 식당에 가지 않고 매점으로 갔다. 매점 뒤엔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쪽문이 있었는데 하느님이 우리의 첫 만찬을 도와주려는 건지 그날따라 그 문이 열려 있었다. 마침 껄렁껄렁한 애들도 그 문으로 나가고 있었다. “우리도 나갈까?” 마음이 심약했던 나는 “그래도 될까?” 하고 물었다. 걸리면 화장실 청소에, 반성문 최소 다섯 장. “나가서 먹자. 매점에는 라면하고 김밥밖에 더 있냐?” “….” “나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그가 나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그러나 나는 나보다 그가 더 걱정되었다. 그는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나는 딱히 모나지도 튀지도 않는 그런 아이였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오니 정말 좋았다. 따스한 봄 햇살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우리는 그 따스한 공기를 마음껏 흡입하며 다정하게 걸었다. 내가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중국집으로 갔다. 마치 오래 사귄 연인들처럼 입가에 검은색 짜장 국물을 묻혀가며 우리는 맛있게 짜장면을 먹었다. 배도 부르고, 좋아하는 사람도 옆에 있고, 여자 친구랑 있을 때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상하게 동성인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게 느껴졌다. 아마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계단난간에서 그를 넋 놓고 바라보았을 때부터, 나는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언젠가, 이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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